목회단상

하나가 되는 공동체 구원의 감격과 거듭난 기쁨을 나누는 교회, 세상으로 파송 받은 삶을 감당하는 교회입니다

무화과나무는 너와 나의 이야기이다!

  • 느헤미야강
  • 2016-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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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27(토) 마태복음 21;12~22묵상


무화과나무는 나였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종려나무가지, 자신들의 옷을 벗어

주님의 길을 예비했다.

그런 환영은 앞으로도 없을 듯 했다.


겉옷?

나를 치장하는 옷,

나를 포장하는 옷,

이 옷 벗으면 나의 참됨을 드러내는데

나의 수치와 부끄러움,

거짓됨도 보이는데...


바울은 각종 세상 옷들을 배설물과 같이 버렸다.

에스더는 왕비의 옷,

모세는 왕자의 옷을,

제자들은 어부의 옷을,

마태는 세리의 옷,

지금까지 입고 있던 옷을 버리는 것이 쉽지는 않다.

주님을 찾아왔던 부자 청년은 재물의 옷을 벗지 못했다.


그토록 환호했던 저들이

6일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했다.

이들은 한때 호산나 라고 환호했지만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참 이유를 몰랐다.


왕관이 아니라 가시관을 쓰기 위해서,

왕복이 아니라 인류의 죄악의 옷을 입기 위해서,

왕좌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서...


성도는 입성때도 환호하는 자 되어야 하나,

십자가에 달릴때에도 함께 해야 한다.

내 마음에 주님이 입성할 때 기뻐해야하나,

고난과 헌신, 수고의 땀에도 앞장서야 한다.


사람들은 주님께, 교회에 자기의 육신의 바라는 것을 요구하고

그것이 만족되지 않을때 주님을 멀리하고 교회를 떠난다.

유대인들의 환호가 좋은데 불편하다.

언제든지 나도 그럴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나를 보는것 같아 불편하다.


2.

주일에 입성하시고

월요일에 무화과나무 저주!

마가복음에는 아침에 예루살렘에 가시다

열매 없음을 보시고 저주(막11;14).

다음날 아침 그 길을 지나가다가

무화과나무가 뿌리 채 마른 것을 보았다(막11;2)

이 무화과나무는 많은 사람들이 보고 지나가는 길가에 있었다.


기독교는(성도)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거리(곳)에 있다.

누구나 무화과나무를 지켜보듯이

기독교를, 성도를 지켜보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노출되어 있다.

10가지 잘하는 것에 대해서 칭찬은 인색하나

1하기 잘못에 대해서는 야박하다.


그런데 이 무화과나무가 열매가 없다.

마가복음은 무화과 나무가 열매를 맺을 때가 아니라 했다.

본격적인 무화과추수기는 6-7월경,

그러나 이른 무화과 열매는 3-4월에도

늦가을에 열매를 맺기도 한다.


그걸 모르실 이 없는 주님이 왜?


현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영적상태를 보여주신다.

열매없이 종교적인 신앙에만 머문 유대인들에 대한 저주이다.


하나님을 믿지만 이제는 열매를 맺어도 되는데

아무런 열매없음 때문에 오늘도

나와 우리, 공동체를 지켜보신다면... 두렵다.


성도가 열매를 맺어야 하는 때는 언제쯤이면 될까?

입술, 말, 섬김과 헌신, 눈물과 수고,

멋진자리 말고 낮아진 자리.

1년, 10년, 20년?...

잎사귀가 있으면 무화과나무는 열매의 철이다.

그러니 잎사귀가 무성하면 길 가는 사람들이 쳐다본다.

혹 열매가 있을줄 알고...

나를 쳐다본다.

혹, 열매가 있는가 하고!


무화과나무는 아무리 잎이 무성해도 필요없다.

잎이 필요한 게 아니라 열매이기 때문이다.


오늘, 주님이 잎의 무성함을 보고 가셨듯이

사람들의 잎의 무성함을 보고 다가오신다.

나의 잎의 무성하믈 보고 다가오신다.


잎사귀밖에 찾지 못하는 주님이 되지 않으시도록...

그러지 말아야 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