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단상

하나가 되는 공동체 구원의 감격과 거듭난 기쁨을 나누는 교회, 세상으로 파송 받은 삶을 감당하는 교회입니다

하필이면 꼭 그 곳이어야 했을까!

  • 느헤미야강
  • 2016-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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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없는 분이 당하신 고통, 무엇때문인가?(생명의 삶)
마태복음27장 27-44절 말씀묵상과 영성일기

1. 구레네 시몬의 십자가, 나의 십자가(32절)

구레네 시몬.
그는 북아프리카 리비아의 수도 트로폴리 근처 구레네라는 곳에서 온 사람.
마가는 그를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묘사한다.
이들도 십자가의 길 현장에 있었다.

그들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있었던것이다.
성전을 방문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큰 꿈이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유월절 밤은 그들에게는 최고의 밤이었을 것이다.
친척들을 만나서 유월절 식사를 나누며
출애굽 사건을 기억했을 것이다.

목요일 밤, 금요일 새벽!
도시 한편에서는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죄 없으신 예수께서 붙잡혀 빌라도의 법정에 섰고,
십자가형을 선고받았다.
다음 날 금요일 아침 구레네 시몬과 그의 가족은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아니,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바로 그 때, 그 자리를 지나가게 되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조금만 빨랐어도 지나쳤을 거다.
그리곤, 로마의 군인들은 억지로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다.
그는 그들의 권력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세상 말로는 재수가 없었다고 해야 될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그의 일생 최고의 은혜였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시몬은 이 십자가의 길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짧은 만남, 긴 침묵 속에서 그의 눈빛을 보았을거다.
구원자의 눈빛, 용서와 사랑의 눈빛.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진 유일한 사람이다.

로마서16;13절에 루포와 그의 어머니의 이름이 로마서에 언급되어 있다.
아마도 그들은 초대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롬16:13).
의도하지 않았던 억지로 진 십자가인데
시간이 흘러 그의 아내와 아들 루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되어 있었다.
억지로 진 십자가는 그에게 재수없음이 아니라 축복이었다.
아니, 억지로 진 십자가에서 그는 참 생명을 본 것이다.

구레네 시몬의 십자가!
억지로 진 십자가!
나에게도 예수님 대신 감당해야 할 십자가가 있다고 말씀하는 것은 아닐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8:23)

누구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할 수는 없다.
구레네 시몬이 구원을 받은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졌기 때문이 아니다.
나의 어떤 공로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가 져야만 하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십자가이다.
그가 흘린 피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피이다.
하지만 적어도 예수를 만난 사람이라면
자신의 십자가를 감당해야 한다.
더 이상 십자가와 무관한 삶을 살수는 없다.
더 이상 그분을 모른 척하면서 살수는 없다.

나의 십자가는 무엇일까?
나는 예수님 때문에 무엇을 손해보고 있는가?
나는 예수님 때문에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고 있는가?
억지로라도 여러분이 져야하는 십자가가 있지 않는가?

예수님은 나에게 그의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나는 그 십자가 감당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감당해야 할 각자의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시는 듯하다.

2. 해골의 곳(33절)

해골!
예수님의 사형집행 장소이다.
골고다라고도 하고, 갈보리라고도 한다.
라틴어 Calvaria를 영어표현이 갈보리이다.
해골은 죽음의 결과 드러난 거다.
십자가는 생명의 표적이다.
하필이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 많은 지역중 해골위에 세워졌을까?
예수 십자가가 세워지면 그곳이 어디이든 생명이 임함을 보이신 뜻이다.

세상 모든 사람, 코끗에 호흡이 끊어지면 남는것은 해골이다.
세상이 골고다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세상이라는 해골언덕에 세워진 살아있는 십자가이다.
그곳에 살아계신 예수 십자가를 세우라는 것 아닐까?
내가 가는 곳마다 십자가 세움이 되라는 것.
참 생명은 옆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내려온다.
십자가를 통해서만 온다.
생명은 골고다위에서 자기 생명을 버리신
예수님 희생이 그 위에 있었기에 가능했다.

내가 누군가에게 십자가를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내가 그 생명을 위해 어떤 희생, 헌신을 감수하려 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이 땅은 가는곳마다 십자가 천지다.
갈수록 생명의 빛 상실하고 있다면
모두 십자가를 세우는 일에만 열심일 뿐,
자기헌신, 희생의 십자가를 세우지 않았기때문이리라.

3.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35절)

당시 사형집행인은 4명.
겉옷, 허리띠, 머리수건, 샌들 그리고 속옷.
겉옷에서 샌들까지는 각자 하나씩 나누어 가졌고,
남은 하나 속옷이 문제였다.
요19;23~24절은 속옷도 취했다고 말씀한다.
제비 뽑아서 한 사람이 가졌다.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숨이 넘어가는 현장에서
가장 엄숙해야 할 현장에서
그들은 오직 옷에만 관심을 가졌다.
요한복음 19;24절은 성경 예언의 성취라 했다.
시22;18절 말씀이다.

그들은 손에 잡힌 소유에만 관심했다.
못 질한 댓가였다.
그들은 주님을 가장 가까이서 가장 늦게까지
예수님을 보고 만난 사람들이다.
예수, 구원자, 생명의 주님을 말이다.
그들이 얻은것은 옷 하나씩이었으나
생명, 천국은 못 얻었다.

눅8장에는 혈루증 앓는 여인이 나온다.
예수님의 옷 자락에 손을 대었고,
군병들도 예수님의 옷 자락을 움켜잡았다.
혈루증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임했고,
군병들에게는 어떤 능력도 임하지 않았다.
혈루증 여인은 예수님의 능력을 사모했으나,
군병들은 옷 자체가 목적이었다.
돌아가는 길!
군병들은 옷을 취했으나 생명은 없었다.
혈루증 여인은 빈손이었으나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나는,
옷을 얻고자 함인가?
생명을 얻고자 함인가?

4. 강도가 달라졌어요(44절)

하나님의 아들이면 내려오라는 온갖 비아냥거림이 있었다.
저가 넘은 구원했으나 자신은 구원하지 못한다며 비웃었다.
44절은 강도들도 같이 욕했다고 쓰여있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막15;32절도 동일한 고백을 한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그런데 눅23;39~43절은 이렇게 되어 있다.
39절,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절,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절,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절, 이르되 예수여 당시느이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나 마가복음은 다른 이들이 예수님을 비아냥거리고 악담을 퍼부었을때 
두 강도도 같이 욕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강도 중 오른편의 사람이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앞에서까지는 저주했는데
이제 동료를 꾸짖고 우리는 응당한 댓가를 받는 거지만
예수님은 그럴 분이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자신도 구원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오른편 강도,
그도 처음에는 자신들과 같이 악한 자의 한 사람으로 보았을거다.
그러나 십자가위에서 말하고 행하는 모습은
자신들과 너무나 달랐다.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가 아니면 볼 수 없는 모습.
십자가 위에서,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최후의 순간에
주님을 보았다.
그 주님이 그 인생 가운데 들어간거다.

예수님은 이 강도에게 ‘너는 늦었다’ 하지 않으셨다.
이 땅에서 행한 일이 없으니 ‘안된다’ 하지 않으셨다.
‘난 모른다’ 하지 않으셨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고 하셨다. 
눅23;40-43절이다.

강도에게 하신 말씀은 곧 나에게 하신 말씀이다.
구원받을 유일한 길을 보여주신다.
강도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했다.
구세주의 필요를 인정했다.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알았다.
살날 얼마 남지 않는 강도,
그러나 자신을 죄인으로, 예수님을 부르고 고백하는 자는 누구나
영원한 구원에 이름을 말씀하고 있다.

5. 길이 참으신 이유(40~43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함께 희롱에 동참했다.
그들은 적어도 한 나라의 권세가 들이고 영적 지도자들이다.
하지만 행인들과 여타의 무리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을 하였고,
더 나아가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믿겠다고 했다.
놀림이요 비아냥이며 진심없는 말이었다.
그들 역시 잔인하기 짝이 없었고,
사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더 나빴던것은 십자가상에 고통 받고 있는 주님 앞에서
그런 말을 했다는 점이다.
아직은 숨이 끊어지지 않았던 관계로
그 소리를 주님이 다 들으셨을 것이다.
어쩌면 주님은 그런 조롱과 야유가 더 아프셨을지 모른다.
하지만, 주님은 십자가의 그 고통과 사람들의 희롱과 모욕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았다.

주님은 하나님이셨다.
얼마든지 십자가에서 내려올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아예 꺾어 버릴 수 있는 분이셨다.
세상을 그 때 멸망시켰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스스로 무능력자가 되셨다.
한계 있는 몸으로 남기로 선택하셨고, 변치 않으셨다.
그래야 당신의 백성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모진 십자가를 끝내 감당해야 비로서
우리의 구원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십자가는 당신이 하나님이라도 내려 올 수 없는 십자가였다.

그렇게 이루어진 구원이다.
우리도 세상의 조롱과 사람들의 멸시를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복을 받아
돈도 많이 벌고,
진급도 하고,
자녀들도 잘 되고,
만사 형통해야 하는 것 아니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아
사고도 나지 않고,
암도 걸리지 않고,
기도하는 대로 소원성취해야 하는 것 아니야?’

참으면 좋겠다.
인내해야 한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그렇게 값싼 것이 아니다.
어떻게 이루어진 구원인데
우리 구원은 기필코 완성되어야 한다.

주님의 편에 서야 한다.
어떠한 수모와 모욕이 있더라도 주님 곁에 있어야 한다.
인내하지 못하면,
기다리지 못하면,
내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사악한 세력 편에 서게 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