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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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드린 무덤과 세마포가~!

  • 느헤미야강
  • 2016-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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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25(금) 마태복음 27;45-56 묵상과 일기


1.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뭐라 소리 지르셨는지는 모른다.

다른 복음서를 미루어 보면 아마도

‘내가 다 이루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

그 말씀을 하시고 운명하셨을 거다.


이렇게 묵상을 한다면,

아버지, 내가 다 이루었어요.

이제 된거에요. 다 된거 맞죠?

그리고 큰 소리로 외치신것 아닐까?

아버지, 내가 다 이루었어요.

내 영혼을 아버지께 맡깁니다.

강하되 부드럽게, 그러나 확신있게.


패배자의 마지막 몰아쉬는 쉼이 아니다.

운명에 체념한 자의 굳어버린 말도 아니다.

이 말은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 해야 할 일을

다 하셨다는 선언이다.


무엇을 다 이루셨기에 그리하셨을까?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제사였다.

모든 살아 있는 사람들은 죄인들이며

죄의 삯은 사망이다.

사망은 단순히 육체적인 죽음만이 아니다.

영적인 죽음을 포함한다.

죄인이 다시 하나님앞에서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것은

제사뿐이었다.

하나님이 모형으로 가르쳐 주셨다.

구약은 반복되는 제사

주님의 죽으심은 단 한번으로 끝나는 제사.

이 제사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셨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때부터

동물을 희생시킴으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죄의 자리에서 희생 때문에 살게 되었음을 깨달았을 터.

당신이 제물되시고 십자가를 제단삼으셔서

제사를 드리신 것이다.

이 일을 한 번에 완벽하게 다 이루셨다.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셨다.

죄로 인한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존재이다.

화목제물을 통해서 다시 회복할 수 있다.

하나님의 진로를 없이 할 수 있다.

주님의 죽으심은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것을 회복하기 위한

화목제물 되심이다.

단절을 회복으로 이어놓으셨서고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셨으니 다 하신 것이다.


값으로 사셨다.

구속은 라틴어로 ‘다시(거듭)’의 의미를 뜻하는 re와

‘사다’ 라는 것을 뜻하는 emere 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이다.

구속은 ‘다시 사는 것’을 뜻한다.

죄의 형벌과 권세에 대해서 노예상태에 있던 우리.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모든 죽음의 권세와 형벌에서

자유롭게 했다.

우리를 값으로 사셔서 그것을 다 이루셨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그런 것이다.


그렇게 다 이루셨다.

나는 무엇을 이루며 살았을까?

애쓰고 수고해도 이룰 수 없은 것에

목숨걸었던 적은 얼마나 많았는지...

주님은 아셨다.

당신이 어디로부터 오셨고

언제 돌아가셔야 할지를 아셨다.

보내신 분이 있다는것과 다시 부르실것을 알았기에

보내신 자리에서 어떻게 사셔야 할지도 정확하게 아셨다.


나를 보내신 분이

때 되면 부르실 것을 안다면

부르실 그때까지 내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하는 것!

다 이루신 주님앞에서 나를 다시 생각해본다.



20160326(토) 마태복음 27;57-66 묵상과 일기


내가 드린 무덤과 세마포

57절,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절,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59절,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60절,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요셉은 부자였다.

예수의 제자였다.

자신의 죽음을 위해 준비해 두었던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안치했다.


눅23;50-51절을 보면

‘공회의원, 선하고 의로운 사람,

예수를 죽이려는 결의와 행사에 참여하지 아니한 자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모든 제자들이 주님을 배신하고 도주해 버리는

그 죽음과 절망과 공포의 극한 상황속에서

어떻게 두려움 없이 자신을 노출시키면서

예수님의 장례식에 앞장 설 수 있었을까?


예수님을 육적인 욕구로만 따라다녔을 뿐

영적으로 만나지 못한 제자들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버리는 배신자들이 되었다.


절망의 언덕에서 절망보다 더 크고 찬란한 빛을 보여준 사람.

주님을 위한 사랑을 간구했을때

주님은 그들의 사랑을 도구로 삼아 부활하셨다.


아리마대 요셉은 자기 자신을 위해 마련해 두었으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포기했던 새 무덤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시체를 장사 지내는 무덤이 아니었다.

눈부신 부활의 현장이었다.

세마포는 더 이상 죽은 시체를 감싸않았던 천이 아니었다.


부활의 증거품이 무엇이었나?

빈 무덤, 입으신 그대로 남겨진 세마포이다.

아리마대 요셉이 드린 무덤이 부활의 최고의 증거품이 되었다.

주님의 몸에 향을 품고 함께 싸 드렸던 세마포가 증거물이 되었다.

이 보다 더 큰 기쁨과 감격이 있을까?


나 역시 이 시대의 아리마대 요셉이 된다면

그 드림의 작은 것 하나 하나를

최고의 영광의 증거가 되게 하실 것을 믿는다.

주님께서 오늘 죽음의 가장 깊은 날에

나를 향해서 이렇게 약속하고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