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단상

하나가 되는 공동체 구원의 감격과 거듭난 기쁨을 나누는 교회, 세상으로 파송 받은 삶을 감당하는 교회입니다

조금만 더 써요!

  • 느헤미야강
  • 2015-09-20
  • 756 회
  • 0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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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더 써요"
이 말은 이제는 거의 사라진 재래시장에서
가장 많이 들을 수 있었던 말이었습니다.
사는 사람이든 파는 사람이든 흥정이 잘 안될 때 서로 이 말을 몇 번 주고 받으면
거래는 거의 성사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찰제 후로는 좀처럼 듣기 어려운 말이 되었고
더욱이 이곳 캐나다에서는 그런 표현을 쓸 일이 없습니다.
이제 그런 후덕한 인심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누가 쓰든지 조금만 더 쓰면 될 일이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압살롬이 형 암논을 죽인 후에 외가인 그술로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하루아침에 아들 둘을 잃게 되었습니다.
암논은 죽었고 압살롬은 이스라엘에 발붙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풍부한 감성을 지닌 다윗의 슬픔은 그 어느 때보다 더했을 것입니다.
장남인 암논은 죽었다 치더라도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살아있는
압살롬마저 볼 수 없는 까닭에 다윗은 날마다 그 아들을 인하여 슬퍼했습니다.
 
그리곤 삼년이 지났습니다.
다윗의 심복인 요압이 꾀를 내서 드디어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웬일인지 아들을 보지 않고 그의 집으로 가게 합니다.
가택연금 상태에서 다시
이년의 세월이 흘러갑니다.
 
"예루살렘에 돌아온 지 이년이 지났다.
아버지는 아직도 나를 부르지 않는다.
내 죄가 큰 것은 알지만
백성들에겐 관대하면서 왜 왕자인 나에게는 관용을 베풀지 않는거지?
나를 용서하지 않을 거라면 왜 돌아오게 하신거야..."
 
압살롬이 어느 날 썼음직한 일기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은 마음 속 깊은 곳에 점점 앙금으로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죽음을 각오하고 요압에게 중재를 서게 해서
아버지 다윗을 만나 감격의 해후(邂逅)를 합니다.
그러나 시기가 조금 늦었습니다.
이미 그 마음에는 ‘쿠테타’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영원한 상처와 한이 될,
아들의 죽음이라는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다윗이 마음을 쓰는 길에 조금만 더 써서 아들을 확실히 용서하고
더 일찍 만나 주었더라면 뒷날의 고통은 없었을 것입니다.
 
약간의 돈이나 시간,
혹은 손과 발을 쓰면
받는 사람의 마음은 훨훨 날아갑니다.
세상은 어느 한 쪽의 큰 희생을 통해서만 균형을 이루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계든 개인이든 약간의 마음만 쓰면
평화는 이내 찾아듭니다.
 
하나님은 큰 것보다는 작은 것에
몹시 떨리도록 가슴속에 감동의 샘을
숨겨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더 쓰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