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단상

하나가 되는 공동체 구원의 감격과 거듭난 기쁨을 나누는 교회, 세상으로 파송 받은 삶을 감당하는 교회입니다

원망이라는 폭주열차

  • 느헤미야강
  • 2015-12-06
  • 771 회
  • 1 건
초대교회의 큰 위기는 핍박의 문제였으나
그보다 더 큰 위기는 원망이었다.
핍박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라면,
원망은 내부에서 온다.
외부로부터 오는 핍박은
공동체를 하나로 결속시키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으나
내부에서 오는 원망은 오히려 내부결속과 공동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
그래서 핍박보다 원망이 더 무섭고 위험하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행전6;1)
 
이스라엘 땅에 계속 머물러 살았던 히브리 유대인.
주변 나라에 흩어져 살았던 디아스포라 유대인.
예루살렘 교회 안에도 이 두 부류의 유대인들이 있었다.
당시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매일 양식을 나누어 주어야 했는데,
하필이면 헬라파 유대인들이 제외되는 일이 발생하자
원망함이 일어났다.
한 두 번이야 참을 수 있었을 것이다.
소외되는 일들이 계속되면 누구나 그럴 수 있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 실수 할 수도 있다.
불평과 원망은 늘 어디에나 있는 일이다.
 
한편, 자기 소유를 팔아 드린 이들은
도와주고도 욕먹는 셈이니 그들도 원망할 수 있다.
히브리 유대인들은 그것가지고 원망하냐 할 수도.
원망이 생기는 일이라면 없애버리자 할 수도 있다.
 
시험이나 원망이 생길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방법이 그만두는 것이다.
선교회장 안해!
속장, 인도자 안해!
교사, 성가대 안해!'
주차봉사, 안내위원, 꽃꽂이 안해!
부부관계도 문제가 생길 때 가장 쉬운 해결 방법은 갈라서는 것이다.
성도 간에도 문제가 생기면 교회를 떠나는 것이다.
이런 저런 섭섭한 이유를 대고 떠나면 제일 쉽다.
 
문제는 이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지만 해결책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탄이 의도한 대로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탄은 끊임없이 문제를 통해 우리의 일을 중단하게 만든다.
정확하게 말하면 시험은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다.
내가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사단이 세상가치와 서운함, 속상함들이라는 생각을
슬쩍 던져 준 것을 받은 때문도 있다.
잠시 생각할 수는 있으나
오래 묵상하고 생각한 끝에 임한 결과이다.
 
교회가 경계해야 될 것들이 원망이다.
원망은 망하는 죄이다.
 
출애굽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하고 망했다.
우리는 조금만 불편하면 원망이 나온다.
너무 쉽게 원망이 나온다.
주차하기 힘들어서 원망,
덥다고 원망,
추워서 원망.
원망은 원망을 낳는다.
원망이라는 열차는 가속력이 붙는다.
가만히 놔두면 스스로 멈추지 않는다.
 
사도들은 원망들을 때 달랐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말씀에서 은혜를 받지 못하여 그렇다고!”
 
우리가 더 기도하고, 말씀을 연구하여 은혜로 나가겠다 했다.
성령이 그들을 지배했다.
십자가의 은혜를 바르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문제앞에서 정확한 대안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내가 열심히 잘 섬겼는데
나는 마음으로 도와준다고 했는데 불평이 나오고 원망이 나오면,
그 사람의 잘못이 더 크게 보이지
내 잘못이 눈에 안 들어온다.
그런데 사도들은 정말 십자가의 은혜,
십자가의 삶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이었다.
문제를 다른 것에 돌리지 않았고 내 안에서 발견했다.
 
예루살렘 교회에 사람들이 몰려왔다.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기에 구제할 일들이 많아졌다.
교회 같으면 부흥 된 것인데 일이 많다보니
기도가 우선순위에서 슬쩍 빠진것이다.
말씀이 우선순위에서 빠져 버린것이다.
결국 시험이 생긴 것이다.
 
아무리 바빠도 기도를 쉬면 안된다.
아무리 힘들어도 기도시간을 놓치면 안된다.
말씀을 더 깊이 읽고 연구하고 살아내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래서 말씀보다 기도보다 앞서지 않는 삶이 되어야 한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맡았던 구제사역을 교인들에게 맡겼다.
성도들이 의논하여 일곱 사람을 세우게 했다.
더 놀라운 것은
성도들이 의논하여 일곱 사람을 뽑았는데
하나같이 원망의 당사자 그룹이었던 헬라파 유대인들을 뽑았다.
놀라운 감동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십자가 복음이 분명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제자들은 역시 봉사와 구제를 없애는 방법으로 해결하지 않았다.
 
성경이 주목하는 것은
제자들이 말씀과 기도를 소홀히 하고
봉사와 구제를 할때 원망함이 있었다.
그러나 봉사와 구제가 계속되게 했음에도
더 이상원망함은 없었다.
다른 설명은 없다.
오직 말씀과 기도에 전념할 때 일어난 일로 설명한다.
이렇게 하니 초대교회가 갈라질 시험을 만나고도
오히려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다.
많은 제사장들도 예수 믿었다.
이것은 사람이 단순히 전도해서 된 일이 아니다.
감동받아서 된 일이었다.
 
오늘 내 안에 원망이 싹트고 있다면
그것은 사람이나 환경의 문제가 아니다.
말씀과 기도의 문제이다.
 
초대교회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의 역사라는 관점에서는 뜨겁지만,
마귀의 시험이라는 관점에서는 계속되는 시험의 연속이다.
재산도 팔아 바치는 헌금을 통하여 역사하고
어려운 과부를 구제하는 일을 통하여서도 역사한다.
그러나 말씀과 기도로 나갈 때
한결같이 교회 부흥으로 결론지어졌다.
 
말씀과 기도가 우리 안에서 살아 숨쉬고
예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은혜가
내 속에 살아 있을때 일어나는 일들이다.
 
말씀이 분명하고, 기도가 깊어지면
우리 안에도 이러한 기적은 일어날 것이다.
 
원망이라는 열차를 멈추는 방법은
말씀과 기도이다.
 
원망과 불평앞에서 말씀과 기도가 그럴진대
원망없이, 불평없이
말씀과 기도에 인생의 뿌리를 내리려는 성도님들을 볼때마다
안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부흥의 물결을 보는 듯 하다.
 
대나무가 처음 몇 년동안은 싹만 틔우고 자라지 않는다 한다.
그동안은 위로 자람이 아니라
아래로 아래로 물의 근원까지 뿌리를 내리느라고
모든 에너지를 그곳에 집중한 까닭이다.
생명에 뿌리를 닿아 놓으면
그때부터 위로 위로 에너지를 집중하니 금방 자란다.
자라면서 혹 휘어질까봐 중간 중간에 마디마져 놓는 지혜도 있다.
우리 새생명교회가 그런 모양새이다.
그래서 성도 한 분 한 분이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어디까지 자라려고
오늘 그렇게 말씀과 기도에 온 몸을 던지는가?
 
어디까지 자라려고...
    • 그레이스 15-12-11
      전적 동감입니다
      우리는 너무 원망에 익숙해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백성의 모습이나 나의 모습이나 차이가 없는것같습니다
      참을성도 없고 양보도 없고 뭐든지 내가 먼저 내가 더 좋은것을 원하며
      말씀과 기도의 병행됨이 없이는 우리의 모든 약함을 해결할수없음을 알면서도 왜 그리 엍드리고 말씀묵상하기를 게을리 하는지
      묵상과 기도는 하나님과 내가 소통할수있는 유일한 길이며 특권인데도
      왕자가 자기신분을 모르고 거지처럼 사는것처럼 제가 하나님의 자녀인되도 그것을 충분히 누리지못하고 있지는 않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