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단상

하나가 되는 공동체 구원의 감격과 거듭난 기쁨을 나누는 교회, 세상으로 파송 받은 삶을 감당하는 교회입니다

부모는 세지 않는다!

  • 느헤미야강
  • 2016-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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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의 거처가 달려 있는 것!

숫자세기를 시작하면 의미없게 되는 것!

은혜와 삶을 구분하는 것과

받은것을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지 못하는 인생에게 주는 경고!



용서의 문제가 가볍지 않는 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죄가 아니고

나에게 범죄한 사람에 대한 용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의 범죄로 내가 손해, 손상과 타격을 입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두 번까지!

랍비들은 세 번까지!

그 이상 용서하면 비겁한 사람이라 했단다.


그런면에서 베드로는 7번이면 많이 용서해 준거다.

마음이 참 넓는 거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숫자 세기를 시작하면 그것은 용서가 아니다.

부모는 자식의 잘못을 세지 않는다.

내일 또 용서해주어야 할 일이 생겨도 역시 결론은 용서이다.

몇 번 용서해 주었다고 숫자를 세지 않는다.


눅17;3-4절을 보면 이 용서가 억울하지 않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고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마냥 용서하라는 것은 아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이다.


솔직히 말하면 누가복음 말씀이 더 살갑게 마음에 와 닿는다.

적어도 회개하고 미안해 하는 사람에게는 용서하고 싶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불편함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마태복음 때문이다.

단지 누가복음처럼 미안하다고, 회개했으니

용서하라는 차원을 넘어선 것 때문이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

만 달란트 빚진자가 주인에게 용서를 받았다.

1달란트는 6,000데라니온이다. 약 20년 품삯이라 한다.

1만달란트는 20만년 품삯이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금액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죄의 빚을 진 자들이다.

우리 역시 스스로는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자들이다.

그러면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아야 한다.

그래도 갚을 수 없다.

몸을 팔면 종이 되고, 노예이다.

이처럼 내 몸까지 다 팔아도

하나님께 진 빚은 갚을 수 없는 인생이 우리이다.


이게 마태복음이 용서와 견주어서 주시는 말씀이다.


본문의 1만달란트 빚진자가

100데나리온 빚진자를 용서하지 못한 것은

자신이 한때 임금에게 빚진 자였고,

용서받았다는 것을 잊어버린 결과로 오는 문제였다.


은혜를 잃어버리면 그렇게 된다.

아, 내가 받은 은혜를 잃어버리면 이렇게 될 수 있구나.

은혜를 잃어버리면 어디 용서의 문제만 버거움이 될까?


임금이 탕감해준 이유는 불쌍히 여김 때문이다.


롬5;10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아직 연약할 때에~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

원수되었을 때에"


우리 힘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죄의 빚을 하나님께 지고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불쌍히 여기셔서 조건없이 탕감하여 주셨다.

그래서 죄사함 얻고,

하나님 자녀 되었으며,

생명책에 기록되어졌다.


이 1만달란트 탕감받은 자는

엄청난 은혜를 받고서도 자기중심적인 가치관을 바꾸지 못했다.

내가 받은 은혜와 나의 은혜가 필요한 사건을 별개로 보고 있다.


은혜를 잊어버린 까닭이다.

은혜받은것을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지 못하는 인생에게 주는 경고이지 싶다.

성도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세상 속에서의 삶이 차단되고 별개가 되어서는 안된다.

교회에서 받은 은혜, 교회 문을 열고 나서면서 차단되고 별개가 되어 버려서는 안된다.


결론적으로

내가 묵상한 이 이야기의 핵심은 용서하라는 것이 아닌것 같다.


이 이야기의 처음과 끝은 하나님나라이다.

용서하지 않으면

받은 은혜를 은혜로 흘려보내지 않으면

1만달란트 빚진자처럼 대우하시겠다는 말씀으로 다가온다.

은혜를 은혜로 갚지 않음으로 옥에 갇힌자 되었다.

하나님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용서를 안하시겠다는 것으로 들려진다.


사실 굉장히 두렵고 떨린다.

이것은 용서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나의 영혼의 거처가 달려있는 문제이다.


그만큼 은혜를 받은 자 답게 사는것이

얼마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인지를 알게 하시는 것 같다.